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을 1.21 사태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남북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북한은 남한을 적화 통일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다양한 방식의 대남 공작을 펼쳤습니다. 1.21 사태는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여 남한 정부를 와해시키고 혼란을 야기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된 것입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부대는 남한의 최고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목적으로 침투를 계획했습니다. 이를 위해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선발되어, 이들은 철저한 훈련을 받은 뒤 1968년 1월 17일에 북한과 남한의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침투조는 1월 19일, 서울 근처 북악산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경로 상에서 남한의 주민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존재가 발각되었습니다. 신고를 받은 군과 경찰은 즉시 대응에 나섰고, 북한군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1월 21일, 침투조는 청와대 인근까지 도달했으나, 치열한 교전이 발생하면서 작전이 좌절되었습니다.
교전은 북악산 일대와 서울 도심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북한군 일부는 군과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청와대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려 했습니다. 북한군 대부분은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북으로 도주했습니다. 한 명은 남한에 투항했습니다.
이처럼 군경 합동 작전으로 대부분의 무장공비들이 사살되었고, 김신조라는 이름의 공비 한 명만이 생포되었습니다. 추후 사건이 수습되고 기자회견장에서 '왜 남쪽에 내려왔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답해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죠.
이 사건은 남북 관계를 더욱 경색시켰고, 대결 구도를 심화시켰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안보 의식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어 국가 방위 체계가 강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이 현실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현재도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고 남북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며, 북한의 핵 개발 등 다양한 안보 문제가 존재합니다. 1.21 사태는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